며칠 전 재미난 경험을 했다. 아끼는 홍콩 영화 중경삼림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위치한 "kinodvor"라는 독립영화관에서 슬로베니아 자막으로 관람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광동어와 읽을 수 없는 슬로베니아어 자막의 조합 속에서 영화의 시각적 표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영화 관람이 끝난 뒤, 같이 영화를 관람했던 애인에게 "나는 이 영화가 스스로 강력하게 '나는 사랑에 관한 영화예요!'라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것 같아."라고 내 후기를 공유했다.
영화가 개봉했던 1994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홍콩에서 자란 왕가위 감독의 창작에 홍콩의 정치적 상황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창작자의 결과물에 무조건 조금이라도 묻어나오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가위 영화는 '홍콩 반환에 대한 은유'로 많이 해석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중경삼림의 가장 큰 정체성은 바로 "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이야기
하지무 役 금성무
"Woman in blonde wig" 役 임청하
왓챠 플랫폼에 올라왔던 <헐 왓챠에 이동진> 왕가위 감독 편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했던 말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의 등을 보았던 사람들이라는 의견이었는데,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왕가위 감독의 고장이자, 그의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홍콩은 구룡반도와 홍콩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홍콩섬 때문에 항구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국제적인 금융도시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홍콩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홍콩은 특유의 외로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감성이 왕가위 감독의 이야기와 인물들에 묻어나게 된 것 같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에도 그 특유의 외로움이 묻어나있다. 금성무와 임청하가 중심 인물들로 등장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자친구에게 헤어짐을 통보받은 금성무와 비지니스 파트너이자 연인 사이였던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배신 당한 임청하는 모두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관계에서 상대에게 먼저 버림 받은 존재들이다. 그리고 영화는 두 인물을 통해서 이별에 대처하는 두 태도, 서툴게 이별하는 태도와 익숙하게 이별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으러 편의점에 간 금성무
버림받는 사람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사랑이야 한 쪽에서만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연인 관계란 한 쪽이 그만두면 다른 한쪽은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지 않아도 그만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배드민턴과 같은 것이다. 같이 배드민턴을 쳐주던 상대가 사라지면 나 혼자 배드민턴 채는 휘두를 수 있을 망정 게임을 계속 진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연인에게 버림 받은 두 사람의 반응은 매우 다르다. 슬픔을 잊으려 노력하고, 다른 새로운 사람을 사랑해보겠다며 '바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여성을 사랑하겠어!'라고 다짐하는 하지무는 이별을 처음 겪어 보는 사람 같다. 발라드 가사에 흔히 나오는 '이별에 서툴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랑에 유통기한, 즉 끝이 있다는 사실을 비통해하며 슬퍼하는 금성무는 서툴게 이별하는, 첫 이별을 겪는 사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임청하는 덤덤해 보인다. 배신감에 상처입지 않아보이지는 않지만, 금성무처럼 아득바득 슬픔을 떨쳐내려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바에서 만난 금성무의 파인애플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는 독백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파인애플을 좋아해도, 내일 당장 싫어하게 될 수 있고, 지금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내일 갑자기 파인애플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임청하는 그녀의 옷차림에도 그녀의 믿음이 묻어나있다.
임청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건, 사랑이라는건 한순간에 변해버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랑에 성숙한 여인이다. 갈대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달은 그녀는 금성무 보다 이별에 대해 덤덤하게 덜 감정적으로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서도 외로움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바에서 취한 임청하를 호텔로 데리고 온 금성무. 둘은 같은 장소, 같은 화면 속에 담기지만 임청하가 술에 취해 잠들어 버렸기에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다. 혼자 티비를 보면서 샐러드, 버거 그리고 감자튀김을 흡입하는 금성무가 화면에 잡히는데, 감정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마구 먹는듯해 보였다.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음식으로 달래는듯 했다.
금성무는 아침이 되자 임청하가 일어나기 전에 호텔방에서 나가버린다. 이렇게 금성무와 임청하의 만남의 장면은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연결되지 않은 외로운 삶을 살고있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 마냥 끝나는듯 해보인다.
하지만 왕가위는 여전히 사람은 사람에게 사랑을 얻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나보다. 서로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릴 줄 알았던 금성무와 임청하의 하룻밤의 인연은 서로에게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는 결말로 끝이난다.
파트너를 총으로 살해한 임청하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통조림을 모두 먹어치운 금성무
극중 두 인물은 이별을 대하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두 인물 모두 과거의 사랑에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인물들이다. 임청하는 파트너를 총으로 살해함으로써 연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쏴버리고 금성무는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음식인 파인애플을 먹어 치움으로써 연인에 기억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배설해버린다.
버림받은 슬픔과 사랑에 대한 배신감을 죽이고 둘은 다시 사람들이 오고 가는 홍콩에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어지러운 홍콩 속에서 실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던 중경삼림의 첫번째 이야기는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회사명 또는 이름을 입력하세요. thinkdroptoyou@gmail.com 여기에 주소를 입력하세요. 여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세요. 수신거부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