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말 그대로 'Somewhere in northern Italy'에서 보냈던 7월이었다. 알군의 고향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지내면서 다른 북부 도시들, 볼로냐, 베로나, 가르다 호수, 밀라노를 여행했다. 알군의 장거리 운전이 혹시 알군을 너무 지치게 해서 여행을 같이 즐기지 못할까 걱정했었지만 막상 차 안에서 나눴던 대화와 같이 들었던 노래가 즐거웠었기에 장거리 운전이 오히려 여행을 더 즐겁게 해줬던 것 같다.
해야할 일에 대한 걱정 없이, 누군가를 먹먹하게 그리워하는 마음 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을 옆에 둔 채 내가 사랑하는 여름 계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낼 수 있는게 너무나 꿈같았다.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2023년 7월같은 여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싶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 그 감정을 두려워하지말고 즐기라고 했던 엘리오의 아버지의 말처럼, 7월의 나는 매순간 후회없이 알군을 사랑했다! 하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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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귀를 기울이면
8월 29일 런던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알군과 말 그대로 24/7, 하루종일 붙어있던 여름을 보낸 뒤여서 그랬는지 막상 떠나오는 날이 다가올때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이미 세 번째 만남이었어서, 그 이후에 네 번째 만남이 있을거라는걸 믿고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하고, 가을동안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여유롭게 지냈던 여름동안 계속해서 마음 한켠에 남아이었고, 이제 서울에가서 빨리 내 할 일을 해야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덜 슬펐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덜 슬펐다는 말이지 가뿐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울에 갔다는 것은 아니다. 런던 공항에서 나에게 런던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공항 직원이 내가 고개를 들고 퉁퉁 붓고 빨개진 눈으로 쳐다보니까 미안하다고 하고 가버릴 정도로 많이 울었었다. 헤어짐은 언제나 힘든 것 같다.
알군과 서로 다시 만나기전까지 각자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말하고, 겨울에 만남을 약속했던 순간이 지브리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마지막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를 기울이면은 각자 미래를 위해 지금은 잠시 헤어지는 주인공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간 뒤 마을을 내려다보며 미래의 만남을 약속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 뒤,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주인공들이 다시 만났을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었다.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전까지, 매번의 헤어짐 그리고 매번의 만남동안 항상 나와 알군이 더 발전한 모습으로 같이 성장해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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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프란시스 하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할 일은 아주 명확했다. 미술사 대학원 준비! 할 일이 명확히 있었고, 겨울에 유럽에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평일 저녁 매일 알바를 시작했었기에 아주 바쁜 일상을 지내게 된 달이었다. 그러나 졸업유예생이라는 애매한 신분 때문인지, 자주 내가 목적없이 떠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어른으로서 1인분을 자리잡고 해나가고 있는데 나만 아직 현실을 모르고 덩그라니 살아가며 사랑이니 뭐니 내 감정에 대한 고찰이니 뭐니 현실에서 동 떨어지고 별 쓸모 없는 것에만 신경을 쏟고있다는 기분이 들면서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다.
프란시스 하에서 주인공 프란시스가 같은 속도로 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절친이 어느새 남자친구와 동거한다며 프란시스의 삶의 궤도에서 나가버려 혼란스러워했던 영화 초반 부분처럼, 9월은 혼란스럽고 두려운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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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레이디버드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에 자주 잠겼던 달이었다. 친절하고 따뜻하지만 나와 가깝지 않은 엄마. 부드럽지만 괜히 앞에만 서면 속된 말로 '쫄게 되는' 엄마. 이상적이지만 나에게 무관심한 것 같기도한 엄마. 나에게 엄마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존재이다.
언제나 마음 한켠에서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하면 재생되는 영화 대사가 있었다.
"I wish that you liked me."
"Of course I love you."
"But do you like me?"
레이디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버드와 엄마의 대화이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잘 알고있지만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항상 불안했던것같다. 하지만 10월의 나의 생각들이 무안하게, 난 12월 출국하기 전 엄마가 보내줬던 메시지를 읽고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2024년도의 새해 목표를 살짝 말해보자면, 내 새해 목표는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슬쩍 엄마와의 대화의 문을 열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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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레이니데이 인 뉴욕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떨렸던 대학원 면접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며 매일 매일 특별하게 할 일 없는 채로 보냈다. 분명 면접을 잘 본 것 같았지만, 결과는 모르는 일이라며 불안한 생각이 자주 들기도 했고, 여름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겨울을 싫어하는 나기에 점점 겨울이 다가오며 추워지는 날씨에 우울한 생각이 자주 들기도 했다.
대학생, 특히 고학년이 된 이후부터 친구들과 마음대로 만남을 자주 갖기도 어려워지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기도 해서 원래도 외로움에 취약했던 나였지만 더더욱 2023년 가을에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11월의 나는 할 일 없이 나른하게 카페에서 빈둥거림을 즐기면서도 만날 사람 없는 날 혼자 복작복작한 시내를 걸어다니는게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때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레이니데이 인 뉴욕에서 주인공 개츠비가 기대했던 여자친구와의 여행과는 다르게 혼자 외롭게 바에 앉아있었던 장면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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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리틀 포레스트
겨울동안 알군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지내고 있다. 유럽은 외식비용이 아주 비싸다. 그나마 물가가 서유럽보다 비싸지 않기 때문에 가끔 귀찮으면 나가서 사먹는걸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지만 대부분 집에서 요리를 해먹고 있다.
서울 본가에서는 가족들과 밥 먹는 시간대가 맞지 않기도하고, 끼니를 먹을 시간대에 주로 밖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밖에서 사먹는걸로 끼니를 해결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요리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나였기에, '언젠가 자취를 하면 꼭 요리해먹어야지'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오늘은 파스타, 오늘은 김밥, 오늘은 냉장고에 있는 재료 조합을 생각해서 나만의 요리... 이렇게 메뉴를 바꿔가며 끼니를 해먹는 것에 재미를 느낀 겨울이었다.
한창 시니컬했던 시기에 내 마음을 화면에 가득찬 요리들로 따뜻하게 녹여줬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처럼, 12월의 나는 서울보다 너무너무 작은 도시인 류블랴나에서 한적하게 2024년 대학원 새학기를 위한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2023 한 해를 정리해보니 작년(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벌써 2024년이다.)은 짧았던 해 같다. 일 년이 짧게 느껴졌다는 것은 그 일 년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말 같다. 2024도 느끼는 것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지루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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